비를 아는 사람들

2021. 9. 15. 00:47

 

비가 내리고 있었다. 원치 않는 비를 맞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느냐마는, 어쨌든 나는 우산이 없어서 그 비를 흠뻑 맞을 수밖에 없었다. 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어가면 됐겠지만, 나는 한 발짝 내딛는 것이 힘들 정도로 지쳐 그냥 비를 맞으면서 갈 수밖에 없었다. 숨을 한번 내쉴 때마다 버거운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그날 비를 맞는 감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원치 않든 원하든.

J와 나는 데면데면했다. J는 일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협조적이지 못했다. 무뚝뚝한 성격까지 한몫해서 J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가 핀잔을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이란 어떤가, 성격 나쁜 일 잘하는 사람보다는 성격 좋은 일 못하는 사람이 낫다고 J는 점점 고립되어갔다. 그의 완벽성 또한 폄하되기 일수였다. 그래도 나는 J의 상사로서 그가 조직에 스며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J는 스며들지 못했다. 정확히는 자기 자신이 벽을 세워놓고 스며들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J는 그래도 혼자 고립되는 걸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J에게 중요한 보고가 들어가지 않게 되었고 있을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되었다. 다른 직원들의 잘못도 있었으나 J는 모든 덤터기를 쓰게 되었다. J의 완벽주의적 성격상, 그리고 그 일의 감정적인 충격 때문에 -이건 내 생각이지만- J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J가 짐을 가지고 퇴사하는 날엔 비가 내렸다. J는 우산을 가지고 있었고 J를 배웅해주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J는 우산을 들고 짐을 옮겼는데, 짐의 양이 두 손이면 몰라도 한 손으로 들기에는 무시 못할 양이어서 안간힘을 쓰고 옮겼다. 나는 회사 로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결국, J의 짐 중 파일 몇 개가 바닥으로 쏟아졌고 J는 짐과 우산을 내려놓고 내려오는 비를 흠뻑 맞았다.

다른 사람들이 어쩐지 J를 비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단, 나는 이미 비를 맞는 감각을 알고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산도 없이 J에게 달려갔다. 예전에 맞은 비보다는 상쾌하고 가벼웠다. 나는 얼른 파일 몇 개를 주워 짐 상자에 올려두고 두 손으로 짐을 들었다. 그리고 J를 바라봤다. J는 비에 젖어 멍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우산을 들어 내게 씌워주었다. 나는 어쩐지 J와 눈을 마주하는 것이 아팠다. 하지만 J는 회사에 들어온 후로 처음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 미소가 못내 가슴이 시렸다.

내가 몰랐다면, 보지 못했을 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