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글라스

2021. 9. 15. 00:47

 

선글라스를 썼다. 적당한 크기에 검은색. 밖에 나갈 때면 의식처럼 매번 꼈다. 누군가 왜 쓰냐고 물어볼 때면 눈 건강을 위해 쓴다고 말했다. 어쨌든 내 선글라스는 적어도 내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는 내 아이콘 같은 것이 되었다.

선글라스 벗은 모습도 괜찮겠는걸.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내가 싫다고 몇 번이고 말했기 때문에, 주변인들은 더는 내게 저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모른척했다. 왜냐면 내게 말한 사람은 면식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텅 빈 지하철에서 마주 보고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짧은 숏컷 머리에 링 귀걸이, 입은 셔츠엔 화려한 무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 사람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서워서 선글라스를 끼거든.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 듯 그는 말을 이어갔다.

눈에 벌이 들어오거나… 그런 거.

그럼 안경을 끼면 되잖아요.

나는 그 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렇게 지적을 했다. 괜히 처음 본 사람의 말에 이의를 다는 것 같았지만, 그 사람도 내게 무어라 말을 했으니까. 그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맞아, 벌이 들어오는 것도 두렵긴 하지만 그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지.

…….

나는 상체를 등받이에 기댔다. 지하철 특유의 불편하면서도 1시간은 너끈히 버틸 수 있을 법한 감각이 느껴졌다.

눈을 마주하기가 두렵거든.

…….

생각해보면 눈을 보이는 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말이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까.

저야 모르죠.

당신도 선글라스를 끼니까.

그가 말을 하곤 비죽 웃었다. 못내 얄미운 느낌이 들어 눈을 찌푸렸다.

저는 그냥 멋이에요.

아니지, 아니야. 그 옷엔 눈이 보이는 노란 알의 선글라스가 더 어울리는데 굳이 검은색으로 골랐잖아.

제가 옷을 못 입나 보죠.

나는 이 입씨름에 염증을 느꼈다. 고작 선글라스를 쓰는 것에 무슨 의미를 그렇게 부여한단 말인가.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 한들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평소라면 내려서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겠지만, 이건 막차였다. 결국, 이 사람이 먼저 내리지 않는 한 나는 목적지까지 이 사람과 계속 함께해야만 했다.

눈을 보이는 게 왜 두려워?

전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나는 어쩐지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아.

잘못 사셨나 보네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말아.

고개를 돌리고 다른 자리를 바라봤다. 차라리 자리를 옮기면 이야기를 중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꼭 자리까지 따라올 것만 같아 굳이 옮기지는 않았다. 나는 막차를 탈 정도로 밖에 있었고, 이미 지쳐있었다. 그 사람은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하지만 걱정 마, 세상에는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너도 사실 알고 있으니까.

그 사람이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었다. 아주 오랜만에… 내 안경을 벗은 모습을 보았다. 나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막차에는 조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지만 한산했다. 내릴 역이 되어 일어나 지하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