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풀 속에 있던 것

2021. 9. 15. 00:48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혼자였다. 부모님은 내가 12살에 얼굴과 목에 큰 화상을 입자 동생에게 모든 애정을 쏟았다. 얼굴 일부분을 채운 화상은 학교에서도 나를 외톨이로 만들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선 바로 공장에 들어가 혼자 살기 시작했다. 기숙사가 있는 공장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단칸방을 얻었으니 형편이 조금 좋아졌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상 때문에 첫인상은 징그럽거나 불쌍하다는 것을 벗어날 수 없었고, 나는 그것에 염증을 느껴 타인과 어울리기를 꺼렸다. 그래서 30살이 되도록 변변한 친구 한 명이 없었다.

수풀도 혼자였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내가 말하기에도 어이가 없지만, 수풀이 살아있었다. 물론 식물은 당연히 살아있는 거긴 한데, 진짜 말도 하고 감정도 느꼈다. 이걸 어떻게 알았느냐면, 저녁을 먹은 것이 잘못됐는지 속이 얹혀서 수풀 근처에서 헛구역질했는데, 수풀이 혼잣말했다.

이쪽 말고 저쪽에서 하지….

응?

응?

들리는 혼잣말에 대답하니 수풀도 당황한 듯 보였다. 수풀이 말이 없자 나는 헛소리라도 들었거니 하고 넘기려는데 다시 수풀이 말을 했다.

내 말이 들려?

엄마야

뒷걸음질을 쳤다. 수풀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수풀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수풀 안에 들어갈 정도라면 어린이 정도일 터, 이 밤에 혼자 있는 건 위험하니 꺼내려 했다. 아마 숨바꼭질이라도 하다가 밤이 되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다가가서 수풀을 뒤적거리는데 수풀 안에 어떤 동그란 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이 머리통인 줄 알고 쓰다듬었는데 촉감이 달랐다. 손을 떼고 그 촉감을 다시 느끼듯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는데 수풀이 다시 말했다.

내 말이 들리는구나… 처음이야 내 말을 듣는 인간은.

나는 당황해서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드디어 내가 미쳤거나, 이상한 것을 본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후자라면 제법 점잖은 이상한 물체였다.

가지마, 난 나쁘지 않아. 그냥… 대화를 너무 오랜만에 해봐서 그래. 가지 말아줘.

내, 내가 왜….

너무 외로웠어, 제발 조금만 더….

수풀은 내게 애원하듯 이파리를 쫑긋거렸다. 바람이 불지 않았으니 본인이 쫑긋거리는 것이 맞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 뒤숭숭한 마음으로 씻고 잠을 자려는데 단칸방이 어쩐지 크게 느껴졌다.

‘너무 외로웠어.’

그 말이 다시 생각났다. 나는 괜히 벽을 쓰다듬었다. 체기가 다시 올라와 화장실에 가서 토를 하니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픈데 전화할 곳이라곤 내일 아르바이트에 갈 수 없다고 말할 사장뿐이었다. 그 사실이 갑자기 무척이나 서러워, 양치질하다 울어버렸다. 이불 안에 들어가서도 몇 번이고 뒤척이다가, 베개를 몇 번 적시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비가 세차게 오는 날이었다. 우산을 들고 그 수풀이 있던 길을 지나가려는데 그 수풀이 신경 쓰였다. 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싫어 우산으로 최대한 나를 가리고 수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안, 안녕.

…그쪽이 아니라 여기야.

오른쪽 조금 더 옆에서 음성이 들렸다. 나는 몸을 조금 더 움직여 목소리가 들리는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

안녕, 저번엔 그냥 가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들어서 온 거야?

그냥, 너무 매정하게 간 것 같아서.

맞아, 겨우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았는데 그냥 가버려서 서운했어. 슬펐어.

내가 애초에 못 들은 척을 해야 했는데, 미안해.

아냐, 그래도 말을 들어줘서 좋았어. 그 사실까지 후회하진 마.

나는 우산을 수풀에게도 조금 씌워줬다. 수풀은 괜찮다고 말했다, 물은 양식이라고 했으니. 하기야 말만 한다 뿐이지 수풀은 수풀과 다름없었다. 결국, 우산은 나만 푹 쓴 채로 대화를 나눴다.

수풀은 외계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우주선에서 떨어졌는데 자신의 모습 때문에, 인간들이 무서워하고 징그러워해서 지금 모습으로 위장해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수풀을 조금 쓰다듬어주었다. 수풀은 이파리를 쫑긋거렸다.

내 얘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아냐, 나도 오랜만에 이야길 해서 좋았어.

왜 오랜만이야, 너는 사람이잖아.

나도 사람들이 싫어해.

왜?

얼굴이 징그러워서.

난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어.

고마워.

나는 다시 수풀을 쓰다듬어줬다. 수풀은 다시 이파리를 쫑긋거렸다.

여기에서만 있으면 몸이 찌뿌둥하겠어.

이 모습으론 움직일 수 없고 원래 모습으론 움직일 수 있어. 하지만 그러면 어디론가 잡혀가거나, 사람들이 놀라서 도망칠 거야. 그냥 네가 자주 와서 나랑 얘기만 해주면 좋겠어.

알았어.

그 뒤로 나는 몇 번 수풀에게 갔다. 수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주에 대한 낭만이 커졌다. 내 이야기를 수풀에게 들려주면 수풀은 내가 말한 곳을 가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일 때문이지만 제주도에 간 적도 있었고 다른 지방에 경치 좋은 곳을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감흥이 없던 것이 수풀에게 이야기를 해줄 때에는 꽤 낭만적이었던 기억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수풀이 그 공간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가 오는 새벽 계획을 이행했다. 억수처럼 내려오는 비에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 근처에는 CCTV가 없으니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수풀 ?이라고 이름 붙인 외계인-과 수풀 사이를 엮은 풀과 가지들을 정리하고 수풀을 수풀들 사이에서 빼냈다.

뭐하는거야?

우리 집에 가자, 그리고 여행 가자. 일단 우리 집부터 가자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겠어!

이렇게 비가 오는데 누가 수풀 도둑을 보자고 밖에 나오겠어.

비를 쫄딱 맞고 5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나는 물을 뚝뚝 흘리며 방안으로 들어가 수풀을 내려놓았다. 씻을 기력이 없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수풀을 보다가 와하하 웃었다. 수풀도 이파리를 쫑긋거리며 웃음소리를 냈다.

남의 집을 보는 건 처음이야. 집이란 이렇게 생겼구나.

응. 이건 작은 집이야.

그래? 하지만 훌륭한걸.

수풀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수풀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휴가를 냈다. 모아둔 돈으론 가까운 곳을 여행할만했다. 차를 빌리고 수풀을 뒷좌석에 두고 창문을 열어주니 수풀은 밖을 구경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나는 수풀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차를 태운 채로 수풀에게 이곳저곳을 보여주듯 드라이빙을 하고 호텔방으로 들어왔다. 수풀을 호텔 안으로 들이는 것에 조금 문제가 있었으나 어떻게든 넘겼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과일을 먹었다.

과일은 어떤 맛이야?

새콤하고 달콤해.

들어도 모르겠다.

너는 먹을 수 없어?

이 모습으론 못 먹어, 원래 모습이면 먹을 수 있는데.

그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여기서 잠깐 그러는 건 괜찮잖아.

네가 도망갈까 봐. 내 원래 모습이 징그러워서 도망가면 어떡해.

수풀의 말이 끝나자 방 안에 침묵이 어렸다. 나는 내 얼굴과 목에 남은 화상 자국을 더듬다가 웃었다.

나는 안 그래.

어떻게 알아?

나도 사람들이 징그러워해서 사람들이 나랑 안 놀거든, 네가 징그러우면 나도 징그러우니까 괜찮아.

네가 어디가 징그러운데?

네가 모르면 됐어.

수풀은 조금 긴장한 것처럼 이파리가 파르르 떨렸다. 오랜 침묵이 이어지다 수풀이 내게 말했다.

도망가면 안 돼, 그럼 정말 슬플 거야.

응. 안 갈게.

수풀의 이파리가 흔들렸다. 이파리 몇 개가 침대 시트 위로 떨어지는 듯하더니 수풀 안 동그란 부분부터 팔다리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점차 신기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입은 거대했고 팔이 다리에 비해 무척이나 길었다. 겉은 나무껍질과 나뭇잎 같은 것으로 가득했다.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척이나 거대했다. 그것 때문에 침대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풀은 무척 긴장한 듯 보였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도망갈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수풀의 거대한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과일이 꽂혀있는 포크를 내밀었다. 수풀은 머뭇거리다가, 과일을 받아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