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마지막 페이지

2021. 9. 15. 00:44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지구 온난화가 진행될수록 지구도 온도를 낮추려 애를 쓴다고 했던가, 우리에겐 영원한 겨울이 찾아왔다. 언젠가부터 TV와 라디오는 기능을 잃고 발치에는 얼어 죽은 시체들이 가득해졌다. 그리고 이내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 셋 밖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나랑, 윤호라는 남자, 그리고 재영이라는 여자애.

우리는 아담과 이브를 찾을 정도로, 그니까, 재영이라는 여자애는… 17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인류 존속을 위한 숭고한 사명 나부랭이 따위를 들이밀 수 없었다. 게다가 셋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확실치는 않았다. 예를 들어, 저 북쪽으로 넘어가 중국이나 유럽 쪽으로 넘어가면 또 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윤호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북쪽으로 넘어간 다음에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찾기로 했다. 문제는 또 재영이었다, 재영은 다리 한쪽이 얼어 잘라냈으니까. 팔을 자른 윤호나 손가락 세 개가 떨어진 나랑 다르게 걷는 것이 어려웠다. 결국, 팔 두 짝이 다 있는 내가 재영을 업고 가는 것으로 했다. 문제는 내가 여자 하나를 달랑 업고 이 눈밭을 떠돌아다닐 정도로 힘이 세지 않다는 것이겠지. 우리는 아주 느리게 전진했다.

재영아 춥진 않아?

응, 괜찮아.

추우면 말해.

윤호는 재영이에게 사근사근한 남자였다. 내 생각에도 30살이 넘은 나보다는 갓 20살이 된 윤호가 재영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귈지 말지는 내 소관은 아니지만… 일단 셋밖에 없는 상황에선 그렇다는 거였다. 어쨌든 재영도 윤호의 챙김을 익숙한 듯 받아들였고.

이쪽으론 못 가겠는데.

북쪽으로 직진하던 우리는 판문점을 통한 길이 영영 막혀 갈 수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야 세계는 어떻게든 자원을 얻으려 전쟁을 일으켰으니까. 폐허가 되어 잔해들이 가득 깔린 곳을 윤호는 물론이고 재영이를 업은 나까지 뚫고 지나갈 순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나마 멀쩡한 철책 너머로 발걸음을 돌렸다. 지뢰는 저번 전쟁에서 전부 터졌을 것이다. 철책을 뜯고 넘어가는 동안 윤호의 다리가 삐끗해서 내가 앞장서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윤호야, 네가 재영이 업어야겠다.

형, 제가 어떻게 업어요. 힘들면 좀 쉬다가 가요.

그래요, 아저씨.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야.

확실히 밟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발을 떼면 지뢰가 터질 것이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재영이의 다리는 공중에 떠 있고, 윤호는 애초에 밟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나는 죽음의 공포보다 위대한 일을 했다는 고양감이 올라왔다. 세상이 이렇게 된 이후로 내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던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윤호가 조심스레 다가와 재영이를 내리고 어깨동무를 해 부축을 했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먼저 가. 나는 여기서 영영 쉬어야겠다.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다 재영이 상체를 쭉 빼 말을 건넸다. 재영이 어떤 대답 말고 본인이 직접 말하는 것은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오빠랑 나랑 돌봐줘서 고마워요.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머리를 불현듯 깨달았다. 저너머에 누군가 남아있지 않다면, 인류는 이미 끝이 났구나. 윤호는 재영이와 애를 낳을 리가 없으니까. 나는 떠나는 두 사람이 작은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두사람이 몸을 돌려 손을 흔들 때마다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다.

 

모든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날 수는 없었다. 요컨대 인류는 멸망해버렸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