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서 죽을 지경

2021. 9. 15. 00:43

 

요 며칠 우산을 사물함에 놔둔 것치곤 성과가 없었다. 같이 우산을 쓰고 간다, 적어도 내 우산을 빌려준다, 하는 조금은 구닥다리 같은 작전이 실행되는 일은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실 이쯤 되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지도 의심이 될 지경이다.

김지경, 내가 좋아하는 것 같은 사람의 이름이었다.

지경이는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쌍꺼풀은 없지만 동그랗고 커다란 눈, 작은 코, 주근깨가 있지만 깨끗한 피부가 있었다. 제일 절경이었던 것은 앞머리를 없애고 가르마를 탄 이후부터다. 걔가 그렇게 예쁘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 같아 무서울 지경이었지만, 지경이의 진가를 모두가 안다니 어깨가 으쓱해졌다. 적어도 내가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때 부가설명이 더 필요 없을 정도의 귀여움이었다. 웃을 때 들어가는 보조개가 얼마나 귀여운지에 대해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지경이가 예쁜 것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지경이와 나는 11살 때 처음 만났다. 지경이가 이렇게 예뻐진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다. 아니, 사실 내가 모르고 있었다. 옛날 사진을 보니 지경이는 어릴 때부터 동글동글 귀여웠다. 그때는 그러니까… 지경이가 얼마나 예쁘고, 그런지에 대해 알 수가 없었다. 그때는 야구가 제일 재미있었고, 날아가는 공을 보느라 지경이를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지경이… 그때부터 지경이를 볼 수 있었다면 아마 내가 제일 용기가 있었을 시절에 이미 고백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과거를 후회해서 무엇하랴, 나는 지경이에게 아직 고백은커녕 좋아한다는 티도 못 내고 있었다. 지경이가 첫 남자친구를 사귀었다가 깨지는 과정을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구경만 해야 했고. 생각해보면 박지훈, 그 새끼는 머저리다. 지경이랑 헤어지다니…. 하지만 아직 고백도 못한 나는… 에휴 됐다.

 

다시 돌아와서 왜 작전에 실패 했느냐 면은, 지경이가 계속 우산을 들고 다니는 점에 있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차라리 하늘의 탓이라도 하건만, 야속하게도 비는 며칠내리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장마 주간에 우산을 안 들고 다니는 바보가 지경이일 리가 없는데 내 생각이 아주 짧았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지경이에게 고백을 하려면 타이밍이건 분위기건 있어야 했고, 지경이는 누가 봐도 귀여운 여자애니 남자친구가 없는 지금 이 상태에선 누가 금방 고백을 할 것이 틀림없으니까. 마음이 계속 급해졌다. 장마가 끝나고 나면 지경이가 또 새 남자친구가 생길 수도 있었다.

“야, 김지경. 같이 가자.”

“뭘 새삼, 맨날 같이 가면서.”

“다른 애랑 갈 수도 있잖아.”

다른 애랑 갈 수도 있다는 말을 내가 내뱉고 입술을 삐죽였다. 하굣길은 언제나 나의 차지였는데, 남자친구가 생겼던 때에는 밀려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매일 하교하면서 죽상을 하는 것을 숨길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내 말에 지경이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내리곤 우산을 챙겨 나왔다. 오늘도 우산이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서러웠다. 그래서 지경이가 옆에서 말하는 것에도 대충 대꾸를 했다. 어. 어. 몇 번 그랬는데도 지경이는 지치지도 않고 무어라 말했다. 그 귀여운 목소리에 대답하고 싶어도 들리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푹하고 빠지는 느낌이 나더니 다리가 휘청이다가, 이내 완전히 주저앉아버렸다.

“지우야!”

공사 중이던 콘크리트 위로 넘어진 것이었다. 조심하라고 간판이 대충 있었지만, 막아놓진 않았다. 아마 비가 내리기 전에 깔아둔 것인데 비 때문에 굳지 않은 건가? 잘 모르겠다. 스르륵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놀라 허우적거리자 지경이가 내 팔을 잡고 나를 당겼다. 다행히 콘크리트 밖 땅에 손이 닿아 그걸 짚고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온몸에 콘크리트가 묻었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지경이가 울며불며 그걸 손으로 막 털어냈다. 우산까지 집어 던지고 막 털어내는 얼굴이 가까이서 보였다. 좋은 향기가 났다.

“괜찮아?”

두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걸 가까이서 보니 보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 때문인지 주변 소음이 잘 들리지 않고 지경이의 목소리만 뚜렷하게 들렸다. 그 눈을 한참 마주 보았다. 지경이도 몸을 닦던 손을 멈추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지경아, 좋아해.”

 

좋아해서 죽을 지경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