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이 죽은 이유

2021. 9. 15. 00:38

 

- 모든 시작은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을 기억하며

 

시작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요컨대 손톱 밑 때를 벗긴다던가, 거스러미를 제거하는 것 같은, 그런 사소한 일들. 그렇기에 준은 그 사건을 넘겼다. 그것이 이 커다란 재앙의 시작이었을까, 준은 자신이 있는 공간을 살펴봤다. 허름한 공간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처음 온 공간이 확실했다. 낡지만 깔끔한 공간, 바닥에는 먼지 하나 허락하지 않은 것이 주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공간 자체는 허름한 것이 맞았다, 벽면 페인트는 벗겨진 곳이 군데군데 있었고 천장은 뚫려 전선이나 파이프 등이 보였다. - 요새 이런 인테리어가 유행하는 것과는 상관 없어 보였다. - 문제는 이런 공간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공간에 준이라는 사람이 묶여있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내가 어쩌다 이런 곳에 묶이게 되었지.

준은 묶여있는 밧줄을 풀려고 애를 썼지만, 단단하게 묶인 것은 도저히 풀리지 않았다. 게다가 풀려고 몸을 들썩일수록 밧줄이 조여드는 것 같았고, 어쩐지 전기가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감전사라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준은 일단 밧줄을 푸는 것을 포기했다. 준은 소시민이었고, 내일 아침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으나 실제로 죽고 싶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준이라는 인간, 준이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평범하게 초중고를 졸업하고 누군가 말하기를 그저 그런 대학교를 들어갔지만, 전공이 영 아닌 것 같다며 중퇴를 한,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인간이었다. 어쩌면 내 꿈은 저 멀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로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벌어둔 돈을 유럽 배낭여행에 쏟느라 현재 모아둔 돈이라곤 수중에 오만원이 전부인, 그저 그런 20대. 내 부모가 부자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하며 맥도날드에서 감자튀김을 튀기는 기름을 바라보는 20대. 그마저도 금방 그만두고만, 그런……. 애초에 노력이라는 것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자신은 이런 일을 할 그릇이 아니라고 술을 마시고 되뇌는 그런 사람.

일하던 맥도날드에서 잘리니 끼니를 해결할 돈이 부족했다. 수중에 남은 오만원은 통신 요금이었다. 핸드폰이 끊기면 연락을 할 수가 없으니 사실상 오만원은 없는 돈이었다. 편의점에 폐기를 얻으러 갔지만 이미 몇 번 그런 일이 있었던 후여서인지 안경을 낀 아르바이트생은 오늘은 폐기를 남기지 않았다. 괜히 구경하는 척, 원 플러스 원 코너를 돌던 준은 소득 없이 편의점을 나왔다. 벌써 2일째, 준은 물을 제외하곤 먹은 것이 없었다.

배고프다.

배가 고프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슈퍼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하늘을 봤다. 꼬르륵, 소리가 나자 이내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돌아가야 한다. 물이라도 마시려면 돌아가야 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났다. 얼마 전 당신들이 젊을 때 열심히 일하지 않아 자신마저 고생한다고 윽박질렀다. 준은 그 말이 일리가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좋지 않은 처세술이라고도 생각했다. 부모는 이주 일 째 준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다. 용서할 생각이 없다는 것 같았다. 준은 용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궁해지니 어쩔 수 없이 몇 번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하늘에서 툭툭 물이 떨어졌다. 비. 준은 황급히 일어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다 발에 물컹한 것이 밟혔다. 파란색 젤리 같은 물체였다. 벌레라기엔 징그럽게 생기지 않았지만, 이질적이었다. 그 젤리를 밟은 채로 내려다보는데, 꿈틀거리는 것이 마치 밟힌 지렁이처럼 살려달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준은 그대로 그것을 콱콱 밟아댔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제 분이 풀릴 때까지. 그것이 완전히 으깨어질 때까지 밟아대다가 비가 쏟아지자 이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와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그리고 배고픔을 잊기 위해 누워 잠자리에 들었다. 그 후에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 허름한 공사장 같기도 하고 폐건물 같기도 한 공간에.

원한을 사고 산 적은 없는데.

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원한을 산 적은 없다고. 물론 학창 시절 다른 이들과 같이 친구를 왕따시킨 적은 있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주도한 것이 아닌 방관자였으니까. 아르바이트생에게 음식을 받지 못했다고 윽박질러 음식을 공짜로 먹은 적은 있지만, 어쨌든 아르바이트생은 모를 테니까. 준은 다시 몸을 꿈틀거렸다. 어떻게든 나가기 위함이었다. 적어도 저 문까지만 가면 소리라도 질러 도움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얼굴에 차가운 것이 떨어졌다. 파란색 젤리였다. 파이프 사이로 거대하고 차가운 파란색 젤리가 천천히 쏟아지고 있었다.

너, 내 아이를 죽였지.

파란색 젤리가 말했다. 준은 무어라 변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공포로 인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죽였어?

파란 젤리의 물음에 준은 답할 수 없었다. 기분이 분해서, 왜 분했냐면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해서, 왜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했냐면 돈이 없어서, 돈이 왜 없냐면 아르바이트를 그만둬서, 왜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냐면 자신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어서,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준은 천천히 쏟아지는 젤리에 삼켜졌다.